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기 주코프 (문단 편집) === 출생과 성장 === || [[파일:attachment/IMG00917-20120724-1728.jpg|width=100%]] || [[파일:attachment/georgy-zhukov_6-t.jpg|width=100%]] || ▲ (좌)1914년 5월경 입대 바로 직전 촬영한 청년 시절의 사진 ▲ (우)러시아 제국군 [[부사관]] 시절의 주코프.[* 주코프의 첫째 딸 에라, 넷째 딸 마리야의 사진을 보면 이 모습을 쏙 빼닮았다.] 1896년 12월 1일, 러시아 제국 [[모스크바]] 남서쪽 칼루가 주 스트렐코프스카[* 후에 주코프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주코프가 된다.]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. 회고록에 의하면 자기 마을 주민들의 성은 모두 주코프였다고 하고 있어서 집성촌 출신으로 보인다. 집안 사정으로 초등 교육만 받았다고 하며,[* 그래도 부모님의 열성 덕분에 또래 아이들은 기껏해야 2년 정도 배우고 중단했지만 주코프는 3년 과정 전체를 모두 이수했다.] 학교를 졸업한 후 모피장수였던 외삼촌의 밑으로 들어가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지만, [[책벌레|사촌과 함께 야간학교를 다니며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.]] 이렇게 일한 지 몇 년 뒤 외삼촌에게 독립해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고, 뛰어난 수완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.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발발하자 1915년 그도 병사로 징집되었다. 그러나 신병 훈련소에서 성적이 탁월했기 때문에 바로 훈련소 수료후 자대 배치 대신 추천을 받아 [[기병]] 부사관 학교에 들어갔다. 이후 동부전선에 기병으로 배치되었고, 용맹을 발휘해 게오르기 십자 훈장 등 적잖은 무공 훈장을 받았다. [[10월 혁명]]이 발발하자 [[러시아 제국군]]은 해체되었고, 주코프는 전선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.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[[전염병]]인 [[티푸스]]에 걸려 1년 간 요양해야 했고, 회복된 후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[[붉은 군대]]에 부사관으로 입대하였다. 입대 후 [[러시아 내전]]에 참전해 여러 전공을 올렸다. 그런데 이 시기에 자신과 똑같은 주코프라는 성을 가진 [[정치장교]]가 같은 이름을 가진 그를 주목했고, 근무 성적이나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[[사관학교]]에 시험보라고 권유했다. 주코프는 가방끈이 짧아서 별 기대 안 하고 봤는데 덜컥 합격했고, 이후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[[장교]]로 임관했다. 처음에는 [[소대장]]으로 일선에서 활약하며 각지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. || [[파일:external/img.blogin.com/blogin_00344313_158871231.jpg|width=100%]]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Graduation_Photo_Leningrad_Cavalry_School_1925.jpg|width=100%]] || ▲ 기병 지휘관 학교(이후의 [[프룬제 군사대학]]) 1924/25 기수 졸업 당시의 촬영 사진. 2번째 줄 왼쪽에서 2번째가 주코프,[* 사진을 보면 매우 어색한데, 아마도 촬영 당시 불참해서 나중에 합성한 듯. 원래 주코프의 키는 저렇게 크지 않다.] 6번째가 [[콘스탄틴 로코솝스키]], 1번째 줄 오른쪽에서 1번째가 [[이반 바그라먄|이반 홉하네스 바그라먄]], 3번째가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%EC%95%88%EB%93%9C%EB%A0%88%EC%9D%B4_%EC%98%88%EB%A3%8C%EB%A9%98%EC%BD%94|안드레이 예료멘코]]. 이 4명은 모두 원수까지 진급했다. [[1925년]]에는 당시 [[바이마르 공화국]]이었던 독일과의 군사 협력의 일환으로 [[국가방위군|독일군]] 장교들과 교환 연수를 갔는데, 이때 소련으로 맞교환 연수를 갔다 온 독일 장교는 [[제2차 세계 대전]] 당시 모든 장교와 참모진들에서 손에 꼽히는 천재였던 [[에리히 폰 만슈타인]]이었다. [[파일:external/img.blogin.com/blogin_00344318_158872951.jpg]] ▲ 27세의 주코프. 이렇게 점점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점점 승진했고, [[30대]]에 기병 [[여단장]]까지 승진했다.[* 당시 붉은 군대는 계급이 없이 그저 직책만 있었다.] 그리고 고급 장교 코스[* 후에 [[프룬제 군사대학]]이 된다.]에서 공부했다. 이 시기에 소련군 [[종심작전]] 이론의 창시자인 [[미하일 투하쳅스키]] 원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. [[파일:attachment/zhukov1930.jpg]] ▲ 1930년 34세의 주코프. [[1938년]] [[군부]]에 불어닥친 [[대숙청]]의 피바람을 무사히 넘긴 후, 야전 [[사령관]]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[[여단장]]~[[사단장]]급 장교들이 대대적으로 [[군단장]]급~군관구 사령관급으로 승진했는데, 그 덕분에 그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. 이때의 계급이 상장([[대한민국 국군|한국군]]의 [[중장]])이었다. 주코프는 엄격한 [[훈련]]으로 이름이 높았으며, 여러 기동 훈련에서 우수한 지휘력을 보였기 때문에 곧 소련군 수뇌부에서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